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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칼럼

'벚꽃 엔딩을 위하여 꽃보다 아름다운 삶을 쓰다'

"겨울의 혹독함 없이 봄은 여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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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19-09-0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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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고 난 후 장애를 입게 됐다. 신체활동에 제약이 따르다보니

정규교육을 못 받고 자랐다. 주로 집에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책속의 세상과 대화하며

보낸 시간들이 꿈을 키운 도구고 수단이 됐다.”

몸으로 단련된 선수다. 앞으로 4년간 장애인체육회를 책임질 수장은 선수출신이다.
누구보다 현장 안팎을 잘 아우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앞선다. 제4대 장애인체육회 이명호 회장을 만나러
잠실종합체육관으로 들어섰다. 때이른 봄볕이 아지랑이 피워 올리듯 마른 먼지를 일으켰다. 초록순이
어릿어릿한 잔디밭을 지나자 장애인체육회 입간판이 나왔다. 비상을 앞둔 장애인체육회의 꿈틀거림일까,
경기장 주변을 빙 둘러싼 초목에서 상서로운 봄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실내로 들어서자 이명호 회장이 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휠체어는 이미 그의 몸짓언어의 벽을 넘었다.
휠체어 위에서 그는 아주 자유로워 보였다. 그는 먼저 유년 시절의 기억부터 꺼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릴 적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어디서나 장애인을 꺼렸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도 부끄럽게 여겨 골방에서 나오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은 정상인 못지않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CCM가수, 운동선수,
행정가 등등. 그는 10대 후반부터 부산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일찌감치 홀로서기를 배웠다.
가족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 이후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 회장은 혼자 남았다.
홀로 부산에 남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눈이 오지 않는 게 좋았다. 목발을 짚고 다니기엔 눈이 잘 오지 않는 부산이 편했다. 눈이 많이 오는 서울은
겨울만 되면 바깥출입이 어려워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 일찍 자립한 덕에 지금도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다.
20대 때는 직업재활원에 입소해 목공예를 배웠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칭찬에 힘입어
목공예를 하면서 조각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또 그곳에서 시계기술도 익혔는데 그때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한때 CCM가수로도 활동했던 그는 소외계층과 교도소 등을 찾아다니면서 음악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신학공부도 하면서.
“선교 봉사를 다니면서 가스펠을 배웠다. 8, 90년대는 기독교음악이 유행하던 시절이다. 기독교문화가 부흥회를 통해 성행하면서
80년대 들어와 음악선교로 퍼졌다. 당시 장애인 남성 4중창단을 결성했다. 81년도 7월에 창단했다. 감회가 새롭다.
가스펠은 기독교의 대중음악이다. 주로 교도소와 소외계층, 군부대 등을 돌면서 공연했다. 한 번은 강원도 홍천에 있는
군부대를 찾아가서 공연했는데 부산에서 12시간 걸려 입석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2500회 정도 공연을 다닌 거 같다.”

이 회장은 역도선수 출신이다. 그의 다부진 어깨가 시선을 확 잡아끈다. 그는 1999년 방콕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
출전해서 동메달을 땄다. 그가 행정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부산지역 장애인체육의
기반이 열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당시는 비장애인의 인솔 하에 장애인대회에 참여하는 게 전부인 시절이다.
이 회장은 부산시청과 관련기관들을 돌면서 장애인체육회 조직결성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5년 부산에 국내 최초로 시 장애인체육회가 만들어졌다.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그는 사무국장을 맡았고 이때부터
조직으로써 체계를 갖춰 나갔다. 이것이 선수생활을 마친 뒤 자연스럽게 행정가로 변신한 계기가 됐다.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그가 2006년 장애인체육회에 입사하면서부터다. 그는 전문체육부장을 거쳐
생활체육부장, 시설운영부장, 교육훈련부장과 비장애인 선수들의 태릉선수촌 격인 이천훈련원 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베이징장애인올림픽 총감독까지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장애인에게 스포츠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후천적 장애인을 포함해 모든 장애인의 목표가 재활을 통해 사회에 성공적으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와
재활을 접목하면 확실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래야 수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경쟁력을 갖춘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행정가로서 몸소 경험한 것들을 통해 열악한 장애인체육회를 곧추세우려 한다.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과 스포츠과학이나 가맹단체, 시·도 장애인체육회, 국제교류 등등 할 일이 많다.
현재 선수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상시훈련이다. 연평균 130일 정도 훈련을 받아오고 있는데 그 이상의 연중 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또 좋은 지도자들을 섭외해야 좋은 선수가 배출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훈련일수도 늘리고
훌륭한 지도자도 영입해야 한다. 좋은 지도자를 영입하려면 그에 맞는 처우도 물론 보장해야 하고. 그래야 국가대표 선수의
기량을 늘릴 수가 있다. 이와 함께 시·도 체육회에서 신인선수들을 육성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가장 기초적인 생활체육 확대도 같이. 생활체육을 통해 인재발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체육도 마찬가지로 일반체육을 벤치마킹해 구축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생활체육 인프라 확대가 중요하다.
17개 시·도에 장애인체육회가 있다. 경기단체들의 체계화가 우선돼야 한다. 장애인체육회는 아직 법인설립을 못했다.
법인설립을 위해서는 기본 틀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 예산만 의지해선 안 되고 자체 예산을 만들어 나갈 방침이다.”
이 회장은 기금조성 마련이 쉽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노력들을 동원해 기업 후원이 됐든,
경기단체에서 장애인 인력채용이나 상호 혜택을 주고받는 차원의 사업들이든 새로운 사업들을 창출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스포츠마케팅팀을 계획하고 있다. 전문성을 가진 팀이 운영이 돼서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
나름대로 스타 선수들의 운영, 홍보 등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 중이다. 정부의 예산확보 노력도 계속 해오고 있다.
정부의 예산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예산 싸움이기 때문에
노력을 강구해나갈 방침이다.”

이 회장은 거시적인 안목에서 장애인체육회의 비전도 그리고 있다.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사회발전·복지증진 등을 주목적으로 하는 원조)를 통해 아시아국가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개발도상국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정부와 연계해서 저개발국가들에 지원 가능한 부분들을 찾아내려 한다. IPC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와 함께
소속 국가 206개국과 국제교류를 선도해나가는 데 앞장서겠다. 우리나라도 이제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지원하는
나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는 위치가 됐다고 본다. 동남아시아 국가를 사례로 보더라도, 특정 종목의 조직위원회와
산하 위원회를 유치하고 적극 투자에 나서 위상을 높였다. 우리나라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국제심판과 등급분류사도
양성해 나가야 한다. 2018년도부터 등급분류제도가 개편되는데, 이에 대응해 국제무대에 출장하는 우리나라
국제심판이 대외적으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현 구조적인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도 강조했다.
‘개인의 선이 구조의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선수가 운동을 하기 위해선 장소와 기구, 프로그램,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시스템이 갖춰지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우선은 구조 개선에 많은 열정을
쏟을 생각이다. 원래부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을 즐겼다. 부산에서 처음 장애인체육회를 만들었을 때
각 시·도에서 벤치마킹하러 오더라. 음악이나 선수생활이 취미였다면 체육행정가로 여생을 바치고 싶다.
주어진 사명으로 알고 재미있게 도전해 나갈 생각이다.” 이 회장이 벽에 걸린 대한장애인체육회이천훈련원
감도를 가리켰다. 놀러오면 훈련원을 안내하겠노라며 초청했다. “대한장애인체육회이천훈련원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긍지를 가져도 될 만큼 훈련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중국 베이징에도 비슷한 시설이 있지만 우리가
훨씬 앞서 있다. 장애인을 대하는 의식수준에서는 가장 뒤떨어져 있는 것만 빼면 최고다.”

이 회장은 ‘현장 중심 경영’으로 장애인체육 전반을 살필 계획이다.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목전에 두고 있다.
미비한 부분들을 점검해야 한다. 선수층이 두텁지 않은 것도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기존 선수들의 퀄리티도
높여야 하고. 조직위원회와 체육회가 머리를 맞대고 홈 어드밴티지를 얻을 수 있는 방안도 좀 더 치밀하게
봐야하지 않나 싶다. 장애인체육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조직 안정화와 전문성 강화에 주력할 것이다.
또 스포츠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다. 먼저 다가가 소통할 수
있는 대한장애인체육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겠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겨울의 혹독함 없이 봄은 여물지 않는다는 순리를 알고 있다.
그를 흠씬 자라게 한 혹독했던 지난 시간들이 이제 봄을 맞이하고 있다.
타임라인에 선 이 회장은 취임사에서 “장애인체육의 큰 일꾼으로서 자리에 맞는 소임을 다 하고
박수 받으며 떠나는 회장이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앞으로 1만5000여명의 엘리트 선수와 40여만명의 생활체육 장애인을 지원하는 체육회를
얼마나 더 여물고 단단하게 아우르며 혁신해 나갈지 그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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